일곱 개의 질문, 대답할 수 없는 단 하나 — 1984 줄거리 4화

신어 사전을 핑계로

복도를 걷던 윈스턴 뒤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습니다.

돌아보니 오브라이언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윈스턴의 팔에 손을 얹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지요.

최근 타임스에 실린 신어 관련 글을 봤다며, “실력 있는 친구”에게서도 좋은 평을 들었다고 슬쩍 흘렸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요.

윈스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이미 존재 자체가 지워진 사임을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오브라이언은 곧 신어 사전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더니,

텔레스크린 바로 앞에 선 채로 태연하게 자기 집 주소를 적어 건넸습니다.

감시당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담하게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윈스턴에게는 하나의 신호였어요.

이 남자는 정말로 무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낯선 세계, 이너 파티의 거처

며칠 뒤 저녁, 윈스턴과 줄리아는 따로따로 오브라이언의 아파트에 도착해 문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척했습니다.

이너 파티 구역의 넓고 안락한 실내, 좋은 음식과 담배 냄새, 소리 없이 오르내리는 승강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위압적이었어요.

몽골계 얼굴을 한 작은 체구의 하인 마틴이 그들을 안으로 들였습니다.

초록 갓 스탠드 아래 앉아 있던 오브라이언은 텔레스크린을 잠재우고는 책에서나 보던 붉은 와인을 내어주었습니다.

이너 파티원조차 30분 이상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그는 담담히 설명했지요.

그리고 윈스턴이 오랫동안 의심하고 갈망해 온 반역자 골드스타인과 비밀 조직 형제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까?” 윈스턴이 묻자,

오브라이언은 짧게 답했습니다.

“네, 살아 있습니다.”

조직 또한 실재한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일곱 개의 질문

오브라이언은 시계를 확인하며 낮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목숨을 바칠 수 있는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지,

수백 명의 무고한 목숨이 걸린 파괴 공작에 가담할 수 있는지, 조국을 배신할 수 있는지,

아이 얼굴에 황산을 끼얹으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정체성을 잃고 남은 평생을 웨이터나 부두 노동자로 살 수 있는지,

명령이 떨어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

두 사람은 매번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

두 사람이 헤어져 다시는 서로를 보지 않을 수 있는가, 앞에서는 달랐습니다.

줄리아가 먼저 “안 돼요!”라고 끼어들었고,

윈스턴은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 같은 대답을 내놓았어요. 안 됩니다.

오브라이언은 담담히 받아들이며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게 자신들의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붙잡히면 성형과 재교육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심지어 팔다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언젠가 건네받을 책

서류가방을 건네받는 윈스턴

오브라이언은 책을 그 자리에서 주지 않았습니다.

훗날 서류가방을 통해 은밀히 전달될 것이며 14일 안에 돌려줘야 한다고 설명했지요.

앞으로 명령은 오직 자신이나 마틴을 통해서만 전달될 것이고,

언젠가 붙잡히는 날이 오면 무언가는 자백하게 되겠지만 밝힐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도 덧붙였습니다.

떠나기 직전, 윈스턴은 7년 전 어둠 속의 목소리로 각인되었던 문장을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나는 건가요?”

오브라이언은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그대로 되짚었습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암호를 확인하듯이요.

이어 윈스턴이 나지막이 읊조린 잊힌 전래 동요의 마지막 소절까지 오브라이언이 정확히 이어 불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다 하지 않은 무언가가 오간 셈이었어요.

며칠 뒤, 오브라이언이 약속했던 책은 서류가방을 통해 조용히 윈스턴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책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숨겨두었고,

마침내 읽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서가 알려주는 진짜 세계

닷새 동안 90시간 넘게 일한 몸이었습니다.

진리부의 갑작스러운 지시로 윈스턴은 다음 날 아침까지 뜻밖의 휴무를 얻었지요.

그제야 잠잘 때도 몸 밑에 깔고 지키던 그 서류가방을 열어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다락방, 줄리아 옆에서 책장을 넘기다

책을 읽는 윈스턴과 잠든 줄리아

미지근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채 하마터면 잠들 뻔한 그는 채링턴 가게 위층 다락방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창을 열고 낡은 석유풍로에 커피 물을 올린 뒤,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가방끈을 풀었지요.

표지에는 제목도 저자도 없었습니다.

인쇄 상태도 고르지 않고, 페이지는 숱한 손을 거친 듯 낡아 쉽게 벌어졌습니다.

속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과두정치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 지은이 에마뉴엘 골드스타인.

그는 잠시 책을 덮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안전하게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음미했습니다.

텔레스크린도, 문틈으로 엿듣는 귀도 없었어요.

세 계급의 순환

1장 “무지는 힘”이라는 제목 아래,

책은 인류의 역사가 격변을 겪으면서도 결국 상위·중위·하위라는 고착된 계급 구조로 되돌아가는 흐름을 파헤쳤습니다.

신석기시대 이후 늘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해왔고,

이름과 형태는 시대마다 달라졌지만 사회의 근본 구조는 바뀐 적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아무리 큰 흔들림이 찾아와도 자이로스코프가 제자리로 돌아오듯,

세 계급의 구조는 그렇게 반복해서 재생되어 왔습니다.

전쟁은 계속되기 위해 존재한다

책장을 넘기던 윈스턴은 어느새 3장 “전쟁은 평화”에 이르렀습니다.

20세기 중반, 세계는 유라시아·오세아니아·이스트아시아 세 초강대국으로 재편되었고,

세 나라는 자원과 노동력이 걸린 지역을 두고 끝없이 국경을 밀고 당기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전쟁은 실제로 영토를 정복하기 위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배 계급이 전쟁을 멈추지 않는 진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났습니다.

기계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원래 굶주림과 불평등을 없앨 수 있었어야 했으나,

풍요가 대중을 깨어나게 할까 두려운 그들은 전쟁이라는 불꽃으로 잉여 생산물을 태워버리고 대중을 가난과 무지 속에 묶어두려 했습니다.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태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이해했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던 윈스턴은 문득 정적을 느꼈습니다.

옆을 보니 줄리아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지요.

두어 번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책을 조용히 덮어 바닥에 내려놓고, 담요를 끌어당겨 함께 덮었습니다.

책이 막 당의 궁극적인 동기를 설명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하필 그 대목에서 줄리아가 잠들어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윈스턴은 알고 있었습니다.

설령 끝까지 읽었더라도 이 책은 그가 이미 알던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줄 뿐이라는 걸요.

체제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는 이제 선명해졌지만,

그들이 ‘왜’ 인간의 영혼까지 지배하려 드는지에 대한 물음만은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형제단의 서약을 마친 두 사람, 다락방의 평온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5화에서 그 이유를 확인해 보세요.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시리즈 연재작